매주 화요일 7시 30분, 땡땡 콜렉티브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시간입니다. 본격적인 안건을 꺼내기 전에 항상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묻고는 합니다. 이때 최근에 본 전시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요, 『땡땡레터』 12호에서는 그 대화를 여러분과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배신은 언제나 스쳐간다
글. 강리
그는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같은 정방형 캔버스 안에 갇혀있다. 비좁은 화면 안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허리를 편하게 굽히고 목을 앞으로 쭉 뻗었다. 캔버스 안에는 형광등이 밝게 빛나고 있는지 그의 안경에 푸른 반사광이 돈다. 하지만 안경은 그의 또렷한 시선을 가리지 못한다. 시선을 맞춘 채 한참을 고민해보았지만, 도저히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입고 있는 도톰한 면으로 만든 하늘색 풀오버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풍성한 분홍색 머리카락에 노란 머리띠를 한 캐릭터의 음울한 얼굴이 낯익다. 하지만 도통 어디에서 봤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뒷편으로는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노란 직사각형은 바탕을 이루는 고동색 색면과 거친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 극적인 화풍 또한 익숙하지만 누군가 물어본다면 정확히 설명할 자신은 없다.
(좌) 문경의, 〈할머니의 스토브〉, 캔버스에 유화와 아크릴, 80×65cm, 2022.
(우) 문경의, 〈그림이 걸린 방〉, 캔버스에 아크릴, 91×91cm, 2022.
(이미지 제공: 강리)
이처럼 문경의 작가의 〈그림이 걸린 방〉(2020)에서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문경의의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금이라도 인스타그램을 켜면 가장 먼저 피드에 나타날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인물이 입고 있는 옷에 그려진 캐릭터는 198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만화 〈요술공주 밍키〉의 주인공 ‘밍키’를, 방에 걸린 그림은 색채의 관계로 시적인 정서를 자아냈던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작품을 닮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밍키의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고동색과 노란색이 대비를 이루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저 사람의 얼굴은? 문경의의 화면은 관람자를 스쳐지나갔던 이미지의 배신들로 가득차있다. 언뜻 보았을 때는 익숙하지만, 들여다볼수록 확신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배신.
이미지의 배신은 감상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의심하게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다(I see)”와 “알다(I understand)”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문경의는 미술사와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병치하여, 시각적 공해가 난무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의 인지적 작용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이미지들, 우리는 그것을 정말로 보았는가?
얼마 전, 퇴근길의 버스에서 깜박 졸다말고 엉뚱한 곳에서 하차한 적이 있습니다. 헐레벌떡 하차해서 정신을 차리니 청파동이더라구요. 그래서 괜스레 상업화랑 용산점에 들렀다가, 문경의 개인전 《Stragers in Disguise》를 보게 되었습니다. 피곤한 와중에도 익숙한 이미지가 낯설게 중첩되어 있는 세밀한 화폭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비록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기회가 되시는 분들께서는 방문해보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