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호의 세 번째 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 🏃릴레이 글쓰기🏃 3호에서 땡땡 콜렉티브는 ‘릴레이 글쓰기’를 시도했습니다! ‘릴레이’라는 말이 잘 와닿지 않으시죠? 간략하게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주자가 단어를 제시하여 두 번째 주자에게 전달합니다. 두 번째 주자는 단어를 보고 떠오르는 작품을 세 번째 주자에게 전달합니다. 세 번째 주자는 작품을 보고 에세이를 쓰고, 이를 네 번째 주자에게 보여줍니다. 네 번째 주자는 작품과 에세이를 참고하여, 첫 번째 주자가 제시한 단어를 유추합니다. 간단하게 ‘단어-작품-글-추측’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3호의 세 번째 메일에 수록된 「예술혐오¹」는, '현지 – 수연 – 아현 – 강리'의 순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현지가 제시한 단어를 보고 수연이 고른 작품에 대하여 아현이 쓴 에세이를 읽고 강리가 추측하는 과정을 함께 쫓아가봅시다! 마이클 히스는 2002년 11월 3일자 《더메일온선데이 the Mail on Sunday》에 한 만평을 실었다. 한 남자가 미술 작품을 보며 깜짝 놀라는 장면이 담긴 그림으로, 작품 옆에는 터너 상을 받은 작품이 테이트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음을 명시하는 팻말이 있다. 지루함을 느끼는 남자가 감상하는 작품에는 이런 글이 잔뜩 적혀있다. “여기서 하는 말은 전부 헛소리예요! 예술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속임수와 다를 게 없다고요. (…) 여하튼 당신, 그걸 보러 온 거군요. 그래서 그 바보가 누구던가요? 기왕 여기 온 김에 시원한 우리 레스토랑에 들어와서 산뜻한 화이트 와인 한 병 곁들이며 점심이나 먹는 건 어떨까요?”¹ ‘더 메일 온 선데이’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영국의 신문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요일에 신문을 간행하며 영국인이 가장 많이 읽는 신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신문사에서 ‘예술’을 꼬집는 만평이 실렸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예술을 ‘예술’로 떠받드는 이들을 겨냥하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예술은 대중과 멀어진 것 같다. 미술사를 공부하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는 주거공간과 밀접한 곳에서 시작되었지만(호모사피엔스의 생활 양식상 어쩔 수 없는 결과였을 테지만 넘어가도록 한다), 현재 예술은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유명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서 전시를 감상해보자. 여기서 또 다른 조건으로 당신은 예술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 가정해보자. 그런 당신이 입장한 전시장의 장면은 참 낯설다. 작품 하나하나에 달린 캡션을 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고, 도슨트 해설이나 리플렛, 월 텍스트를 읽으면 전문 용어와 미술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요구된다. 분명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나 복잡한 현대 사회에 관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이는 비단 비전공자의 상황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도 한 작품을, 전시를 감상하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아직도 ‘예술’은 자기만의 리그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런 거리를 좁히려는 과거와 지금 미술관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태도는 일관적이다. 그렇지만 예술을 영화로 대치하면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TV, 영화관, 스마트폰 앱 등을 통해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는 대중 예술이다. 그리고 영화는 미술 다음으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허용하는 예술 분야이다. 영화의 탄생과 발전은 산업화와 연관 짓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발전은 대중을 더욱 끌어들이고 심지어는 정치 도구로도 사용되면서 자본주의의 산물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바로 이런 차이점이 ‘예술’과 영화의 대중과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고 본다. 영화에도 많은 장르와 분류 체계가 있다. 대중성이 강한 장르와 ‘예술’성이 강한 장르 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교묘히 즐길 수 있는 방책을 내놓았다. 바로 영화제라는 또 다른 영화의 연장선, 쇼 비즈니스와 엔터테인먼트가 혼재한 공간을 구축해 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에서 그치지 않고 축제로 탈바꿈시켰다. 그렇다면 첫 문단의 만평에서 지목된 대상(여기)은 누구인가? 나는 이것의 범주를 미술계라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미술을 ‘미술’로 떠받드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 혹은 전문가들. 미술을 숨 막힐 듯이 잘 짜인 새하얗고 정교한 공간에 박제하도록 지시하는 사람들. 고리타분하고 비도덕적인 관습을 전통이라 여기며 고집하는 사람들. 그래서 새로운 물결의 흐름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 마지막 표현은 꼭 미술계 종사자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어느 사회든 항상 사라져야 할 관습을 전통이라 우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기존의 방식을 고집한다 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에도 옛것을 곧 법이라 여긴다. 하지만 헌법도 지속해서 개정되고, 심지어 시대에 발맞춰 새로운 법안이 제정되기까지 한다. 법 자체의 길고 두꺼운 역사에 비하면 아주 티끌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역사는 쓰이고 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시대와 걸맞은 법안이 제정될 수 있도록 분투하며 살아가면 된다. 각주 ¹ 『음악 혐오』, 파스칼 키냐르(김유진 옮김, 프란츠, 2017) 에서 제목을 차용했다. ² 『현대미술은 처음인데요』, 안휘경, 제시카 체라시(조경실 옮김, 행성B잎새, 2017), 107쪽. 👻 현지 (단어) 제가 고심 끝에 고른 단어는 태도(attitude)였습니다. 단어를 고를 때만 해도 새 학기가 왔음에 들뜬 마음이 가득했던 것 같은데, 벌써 4월의 끝자락에 와있네요. 저는 삶을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올바른 태도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던 중 이 단어를 고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지만, 구독자 여러분은 위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후 수연이 고른 작품에 예술을 보는 태도가 녹아있음을 느끼며, 정말 단어와 잘 어울리는 작품을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연은 어떻게 《더메일온선데이 the Mail on Sunday》의 만평을 떠올렸을까요? 🌻 수연 (작품) 우리는 모두 다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어떤 대상이냐에 따라 태도는 바뀔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나 관점에 있어서 여러 태도가 나올 수 있기에 제가 고른 작품 《더메일온선데이 the Mail on Sunday》 만평이 모두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현이 만평의 주요 내용과 자신의 관점을 적절히 비교하고 대치해서 아현이 예술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현대미술은 처음인데요』(안휘경, 제시카 체라시, 2017)에서 처음 접한 《더메일온선데이 the Mail on Sunday》 만평은 실로 만평답게, 현실을 유머러스하면서도 간단하게 꼬집어서 기억에 많이 남던 작품이었습니다. 문득 언젠가 이 만평을 비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게 된다면, 꼭 땡땡 콜렉티브 구독자분들과 공유하겠습니다. 😊 🌿 아현 (쓰기) 처음 수연으로부터 작품 이미지를 받았을 때 꽤 당황했었습니다. 주제를 말하는 작품 속 내용 부분이 영어로 쓰여 있어서 해석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작품 출처를 찾게 되어서 내용은 물론이고 사회적 맥락 등을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번 에세이 제목에 관해서 말씀드리면, 최근 제 고민거리이자 심경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일링 서비스를 처음 시작할 때 작성했던 그리고 제 예술관이‘었’던 생각을 완전히 수정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며칠 전 저는 ‘미술관 바깥에서 미술관 내면을 관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심했습니다. 여러 복잡한 이유와 상황에 맞물려서 내린 결론인데, 혹시 모르죠, 또 바뀔지. 💁 강리 (추측) 제가 초고를 읽고 떠올렸던 단어는 '감수성'이었습니다.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현지가 고른 '태도'의 뜻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요? 정답에서 미끄러져서 아쉬운 마음에 하소연 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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