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메일에서는 6월 10일까지 코리아나 미술관(space*c)과 코리아나 화장 박물관에서 진행하는 전시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에 관해 아현이 리뷰합니다. 신미경 작가의 비누로 만든 조각과 회화 작업이 박물관의 유물과 만날 때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지 탐구해 보았는데요. 미술관과 박물관의 차이에 관해 고민해보면서 전시 리뷰를 함께 읽어보세요!
돌모양의 비누와 비누모양의 돌
글. 아현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에는 언제나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책의 부록으로 딸려 온 모나미 365 파란펜부터 꼭 읽으리라 탐했던 이론서와 함께 딸려 온 상품들. 허무하거나 희망찬 이유로 내 방에 자리를 잡은 이 물건들은 소중한 서사를 지니고 있다. 한 사람이 제작하고 사용하는 사물에도 역사가 있다면 그 역사를 통해 인간의 역사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누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알 수 있을까? 물을 만나면 녹아버리지만, 고체 상태에 있는 비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신미경은 비누가 잘 녹는다는 점과 변형 가능하다는 점을 보고 작업 재료로 선택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유물들을 조각하는 그는 비누로 조각을 복제한다. 그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신작으로 연작 〈라지 페인팅〉(2023)을 제작해 비누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회화를 만들었다.
전시 전경(촬영: 이아현)
이렇듯 비누는 원하는 모양대로 변형 가능하다는 점에서 ‘딱딱하다’고 여겨지는 조각의 특성을 틀어버린다. ‘부드러운’ 조각으로서 기능하는 신미경의 작품은 전통적인 제작 방식으로 탄생한 조각과 다르다. 첫 번째 이유로 비누로 만들었기 때문에 후각으로 관람자의 관심을 끌어들인다는 점이 있다. 코리아나미술관의 지하 1층에서 시작되는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람자는 거대한 검은 판을 가장 먼저 마주친다. 전시 서문을 읽으며 화원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비누의 향기 덕분이다. 보통 미술관에 가면 시각 정보만을 이용하는 데 반해, 후각 정보로 작품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비누의 물렁물렁함이다. 정확히 말하면, 쉽게 으스러지고 잘게 쪼갤 수 있다는 점으로, 돌을 깨서 조각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조각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세 번째로는 관람자가 직접 작품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화장실 프로젝트〉(2023)로 작품과 관람자의 관계를 탐색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작업은 〈풍화 프로젝트〉(2023)와 연결되는데, 차이는 관람자의 참여가능 유무로 나뉜다. 조각이기 이전에 비누로 기능함을 내세움으로써 ‘생동하는(performing)’ 작품은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이고 촉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비누가 조각의 재료로 기능하며 발생하는 흥미로운 지점들에 살펴보았다면, 전체 전시의 구성을 다시 한번 훑어볼 필요가 있다. 코리아나미술관과 코리아나 화장 박물관을 모두 전시장으로 조성한 전시는 신미경이 조각한 작품들을 곳곳에 배치하여 미술관과 박물관의 경계를 없애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의도적으로 단절된 시간의 흐름을 교란해 연속적으로 흐르도록 만들어졌다. 코리아나미술관 지하 2층에서 신미경의 작품들과 미술관 소장품들이 교차하여 전시되어있는 모습은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이로써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연속됨에 따라 관람자는 멈춰 있는 줄 알았던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동시적으로 본다. 코리아나 화장 박물관에도 이어지는 이러한 배치 방식 즉, 신미경의 작품과 과거의 유물 혹은 작품의 병렬 배치는 신미경의 작품이 과거를 복제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것을 현재에 소환함으로써 새로운 과거를 작성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우리가 사용하는 사물은 사물로서 그치지 않고 사물 너머의 의미를 다하고 있다. 신미경에게 비누가 단순히 손의 균을 일정 정도로 세균 해주는 사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과거의 역사를 복제하는 도구이자 회화의 재료로서 기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역사가 새겨진다고 가정한다면, 유물이나 과거에 제작된 작품을 복제하여 똑같이 재현한 신미경의 작품은 원본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결부 지어서 봐야 할까 아니면 별개의 것으로 바라봐야 할까. 그리고 집의 화장실에 놓여있는 비누와 신미경의 작업 재료로 쓰인 비누의 구분이 없다고 할 때, 과연 그냥 비누와 작품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지라도 동등한 존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재료의 물성부터 작품과 공간의 관계까지 확장되는 물음 속에서 전시는 ‘경계 짓지 않음’을 상기한다.
저는 매일 비누로 세안을 하고, 머리를 감고, 트리트먼트를 바릅니다. 욕실에서 나오는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함입니다. 얼마 전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저의 실천을 지켜보던 친구가 '동구밭'에서 나온 여행용 키트를 선물해주었어요. "비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이 함께 지속가능한 일상을 제안하는" 동구밭과 함께 환경을 지켜보면 어떨까요?
저는 '비누'하면 비비의 〈비누〉(2019)가 떠오릅니다. '비누(Be new), 비누(Be new), Let's be new'라는 중의적인 가사와 함께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참 중독적인데요. 새로워진다는 뜻을 담은 영어 'be new'와 우리 몸을 깨끗하게 해주는 '비누'는 발음뿐만 아니라 의미도 일맥상통하는 듯합니다. 〈비누〉는 어떤 이와 한두 번 만나본 후 그 사람을 단정 짓고 판단하는 시각, 즉 누군가를 비난하는 마음과 부정적인 생각을 비누로 씻어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018년 신미경 작가 개인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한 아이와 할머니가 아르코 공원을 거닐며 야외 비누 조각상을 동그랗고 커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어요. 저는 그들이 감상을 멈출 때쯤 다가가서 “사실 저거 비누예요." 라고 말했습니다. 스포일러를 하는 것 같기도, 진실을 알려주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들은 떠나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비누라고요?” “어머, 이거 비누래!” 하며 조금 머물러 있었어요. 예상과 실제가 다를 때, 시각과 촉각, 후각과 다를 때, 가끔 숏츠에서 이러한 영상을 보면 저는 시간을 잊은 채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