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호의 네 번째 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 🚆 광주비엔날레 다녀왔습니다! 🚆 제13회 광주 비엔날레를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작품은 김성환의 〈머리는 머리의 부분〉입니다. 강리는 GB커미션으로 제작된 이 작품이 “광주와 하와이 아시안 이민자의 역사가 그들만의 것이 아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이 윤리적 공동체의 발명을 추동할 것이라며 청사진을 그립니다. 「너는 나의 전부」라는 다소 낭만적인 제목 아래 구상된 계획은 정말 실현 가능할까요? 미래의 설계자로서 타당성을 검토하며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너는 나의 전부 글. 강리 전시실 입구 오른편에 설치된 4컷의 흑백 만화는 마치 단순하지만 세련된, 오래된 패션지의 삽화를 보는 듯 하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텅 빈 눈동자와 스스로 움직이는 듯한 머리카락은 어딘가 으스스해 보인다. 이어지는 벽글을 따라 전시실의 어둠을 비집고 들어가자, 두 개의 액자가 어슴푸레 나타난다. 은은한 조명 아래 창백한 두 여자와 인면조가 실재와 상상 사이를 저채도로 부유하고 있다. 세 점의 평면 작업이 제시하는 기이한 장면은, 작업을 보조하는 텍스트가 담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감상자에게 허구적인 인상을 심는다. 가벽 너머에서 들리는 낯선 말소리를 따라 더욱 깊숙이 들어가자, 작품이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의 맞은편에 다소 불편해 보이는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의자는 빛알갱이를 튕겨내며 반짝인다. 화면에서 형형색색의 이미지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 속 이미지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일렁이는 이미지 속에서 제각각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머리를 들고 있다. 짙은 화장을 한복을 입은 채 서있기도 한다. 이들 사이로 과거에 방송되었던 인종차별적인 광고와 하와이의 아시안 이민자에 관한 다큐멘터리 같은 역사적 기록물이 삽입된다. 이때 과장된 이미지와 역사적 사실 사이에서 틈새가 발생한다. 여기에서 김성환은 아이폰의 라이브 포토 기능과 드랙 퍼포먼스를 경유하여, 인종적 편견을 따라 구성된 문화이미지를 되받아 쓴다(write back). 김성환, 〈머리는 머리의 부분〉, 2021, 싱글채널 영상,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23분. (이미지 출처: www.acc.go.kr/main/exhibition.do?PID=0202&action=Read&bnkey=EM_0000004442) 먼저 〈머리는 머리의 부분〉(2021)으로 향하는 진입로는, 마치 사실과 허구를 교란하는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소설 같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사실을 딛고 허구로 나아갈 때, 김성환은 허구에서 사실로 도약한다. 보르헤스의 소설이 우리에게 익숙한 실재 위에 가상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쌓아올려 독자를 몰입으로 이끄는 반면, 〈머리는 머리의 부분〉은 과장되고 낯선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역사적 사실로 진입해 비판적인 거리를 확보한다.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팔짱을 낀 감상자 앞에, 아이폰의 라이브 포토 기능으로 촬영한 사진이 일렁인다. 라이브 포토 기능은 촬영하는 순간의 전후 1.5초를 함께 담아내는 기술이다. 라이브 포토를 이용한다면,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실수로 눈을 감았다고 하더라도 다시 찍을 필요가 없다. 전후로 기록된 프레임 중에서 눈을 뜬 시점을 골라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와 미래를 향해 동시에 뻗어나가는 라이브 포토는, 선형적인 시간선을 교란하며 기이하게 율동한다. 라이브 포토로 촬영된 이미지를 채우는 것은 머리를 들고 있는 사람의 도상과 하와이 아시안 이민자를 주제로 한 드랙 퍼포먼스이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머리는 신체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독점적인 위치를 상기하게 하며, 머리와 머리(카락)에 권위를 부여하는 문화를 돌아보게 한다. 또한 드랙 퍼포먼스를 통하여 체현되는 하와이 아시안 이민자의 외관적 특징은, 인종이라는 개념이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체성의 구조를 탐색한다. 이러한 이미지 사이에 인종차별적 광고와 하와이 아시안 이민자의 진술이 병치된다. 이를 통해 김성환은 인종주의적 대중문화에서 침묵 당한 그들의 목소리를 되살린다. 지배집단의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서발턴(Subaltern)을 주체로 삼는 작업 방식은, 마치 『제인 에어』에서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로 나오는 크리올계 여성 '버사'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다시 썼던 진 리스(Jean Rhys)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머리는 머리의 부분〉은 하와이 아시안 이민자의 역사를 다루며, 우리가 현상을 인지하는 방식과 태도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저항적 의식과 광주의 지정학적 의미가 조우하며, 상대방의 구체적 현실을 직관한 우리로 하여금 청취의 책임을 느끼게 한다. 더 이상 광주와 하와이 아시안 이민자의 역사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들'만'의 것은 없다. 타인의 정동과 서사는 기어코 나의 삶에 끼어들기 때문이다. 나의 일상에 삽화처럼 끼어든 너의 이야기를 통과하면서, 나의 내면에는 복수의 '나'가 생성된다. 이러한 복수성은 우리라는 다양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너라는 토막이 나의 삶에 끼어들면서 비로소 우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발턴의 이야기를 청취하는 행위는 시혜적인 일방향 소통이 아니다. 서로를 향한 책임감을 확대하는 힘이며, 윤리적 공동체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시원(始原)이다. 광주와 하와이 아시안 이민자의 역사가 그들만의 것이 아닐 때, 우리는 비로소 윤리적 공동체를 추동할 수 있을 것이다. 👾 강리 왜 하필이면 광주에서 하와이로 이주한 아시안의 이야기를 상영해야만 했을까요? 처음 〈머리는 머리의 부분〉을 감상하고 들었던 생각입니다. 한동안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 작업의 의도와 효과를 파헤치려고 노력했지만, 한참을 헤매었습니다. 그러다 연극 〈모자_숨_스물 다섯〉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자〉, 〈숨〉, 〈스물 다섯〉이라는 세 편의 희곡이 서로의 이야기에 끼어들며 하나의 무대를 유기적으로 완성해내가는 작품입니다. 각자가 서로의 삽화로서 하나의 전체를 완성하는 힘이 있는 작품들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연극을 보는 내내 하나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하다가, 문득 저의 피부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저라는 사람을 직조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때 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경유하며, 복수의 ‘나’가 이미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변용은 저로 하여금 ‘우리’로 호명되는 공동체를 되돌아보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나’를 완성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만’의 이야기는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에게 청취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가고 싶었고요. 이제 서두에서 던진 “광주와 하와이 아시안 이민자의 역사가 ‘그들만의 것’이 아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후기가 길어졌습니다. 이론의 명징함 없이 사적 경험에 기대어 사유하는 일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행간에서 저의 두려움을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을 들키는 일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 편에서는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글자 너머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독자와 함께 하는 셈이니까요. 항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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