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작가를 소개합니다! 💫 신진작가 연구 💫 2022년을 맞이하여 땡땡 콜렉티브가 주목하는 신진작가를 소개합니다! 오늘은 강리의 「상처는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통하여 작가 이주(Yiju)의 세계에 접근해보려 합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자아’에 기초하여 거즈를 사용한 작업을 검토한 이 글은, 지금/여기에서 차이에서 출발하는 연대의 가능성을 타전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주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상처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글. 강리 나는 지금 한 사람을 상상한다. 그는 백화점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커다란 쇼윈도 위에 그의 모습이 비췄다. 그는 곧 두꺼운 겨울옷으로 가려진 몸을 떠올렸다. 마스크가 가린 팔자주름, 이마의 여드름 흉터, 칼바람 탓에 자랑할 수 없는 허벅지 위의 타투.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얼른 장갑을 벗어 지문으로 스마트폰의 잠금을 해제한다. 그리고 두 입술을 부딪혀가며 또박또박 약속 시간에 늦은 친구를 추궁한다. 이때 피부는 독특한 성질을 지닌다. ‘그’와 ‘그가 아닌 것’을 가르는 경계이자 둘을 중개하는 사이-공간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관습적으로 피부 아래쪽을 ‘나’라고 부르지만, 그의 피부에는 세월과 타투이스트, 사춘기의 손길이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그가 친구와 소통하기 위해 달싹였던 입술 또한 피부의 일종이다. 이러한 까닭에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디디에 앙지외는 피부를 ‘자아의 경계선을 형성하고 타자와의 교류를 촉발하는 장소’로 보았다. 본고는 이러한 피부의 은유에 기초하여, 거즈를 사용한 이주(Yiju, 1997~)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피부의 이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정치적 분열과 역동을 겪고 있는 지금/여기에서 상처가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할 것이다. 이주, 〈피부의 아래와 상처의 바깥〉, 2020, 거즈, 종이에 수채화, 가변설치. (이미지 제공: Yiju) 일반적으로 목면, 실크, 레이온을 사용하여 얇고 성글게 짠 천을 거즈라고 부른다. 주로 의료용 붕대로 소독 조제되어 시판되고 있다. 〈피부의 아래와 상처의 바깥〉(2020)에서 이 거즈는 피부를 직접적으로 지시한다. 다인실 병동의 가림막처럼 생긴 이 작업은, 거즈를 손으로 이어 만든 거대한 커튼에 수채화로 그린 피부의 이미지를 꿰어 만든 작품이다. 분명 공간을 가로지르며 안과 밖을 생성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이와 같은 거즈-막은 분리와 소통을 촉발하는 피부와 닮았다. 이후 두 번의 개인전에서도 앞서 언급한 작업과 유사한 형상을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개인전 《We Scare Because We Care》(백영공간, 2021)에서 선보인 〈piece 1: the room〉에서도 역시 신체 이미지를 새겨 넣은 거즈-막이 등장한다. 그러나 거즈-막 위에 핵폭탄이 터지는 영화의 장면과 음악이 재생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영상과 음악은 거즈-막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는데, 이는 지금/여기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상실을 암시한다. 이주, 〈untitled.1〉, 2021, 거즈, 에폭시, 70×45cm. (이미지 제공: Yiju) 하지만 두 번째 개인전 《혀 아래 날선 진주》(유영공간, 2021)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가 나타나는 듯하다. 이 전시는 거즈를 꿰매어 만든 순백의 커튼을 따라 전시장에 입장하는 일로 시작한다. 관람객을 인도하는 이 커튼은 피부의 고유수용성(proprioceptive)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며, ‘사이(between)’ 지대로서 피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조로 기능한다. 요오드 용액에 적신 거즈 천을 수차례 헹궈내어 만든 〈수의〉(2021)와 관을 떠올리게 하는 〈paar〉(2021)에서는 상처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찾을 수 있다. 이들 작업에서 눈에 띄는 붉은 바느질의 자국은, 파라핀을 굳혀 만든 〈석판들〉(2021)이 가진 나뭇가지 모양의 균열과 시각적 유사성을 갖는다. 상처를 자아와 외부 세계의 강렬한 접촉이 피부에 남긴 흔적이라고 가정할 때, 이들은 타자의 낯선 침투를 수용하고 또 기념한다. 마지막으로 이주는 이와 같은 성질을 되짚으며, 《혀 아래 날선 진주》의 전시 서문을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는 우리 밖의 감각을 이해하길 거부하는 신체의 아집 때문에,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 곳곳의 상처의 흔적을 인식하지 못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해소해줄 수 있으려면, 먼저 그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낯선 고통을 나의 피부라는 경계선 안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되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눈먼 공감의 연속이, 나의 몸과 다른 몸들을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거즈를 사용한 작업을 중심으로 살펴본 이주의 작업은, 피부의 독특성에 기반하여 전개된다. 그리고 분리와 소통이 암시된 공간으로서 피부의 성격을 강조한다. 지금/여기에서 피부의 은유를 되짚는 이유를 추측하자면, 아마도 그 의도는 연대를 향해 숨어있을 것이다. 여전히 피부는 경계면으로서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이지만, 피부는 타자와의 소통이 일어나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주는 우리의 몸으로부터 차이에 근거한 연대를 시작할 것을 촉구한다. 👾 강리 먼저, 작품의 이미지를 제공해주신 이주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주 작가님을 뵙게 된 것은 지난 11월이었어요. 제가 숨가쁘게 유영공간으로 향했던 날이었습니다. 전시장이 닫기 몇 분 전이었어요. 아직도 커튼을 돌아 전시장 내부로 들어갔을 때 느꼈던 긍정적인 압도감이 생생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전시를 만나고 싶었지만, 바로 다음날 사고로 입원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어요. 아쉬운 마음에 메일링 서비스를 빌려 그 순간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도 저의 순간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 땡땡레터 어땠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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